1866년에 처형된 베르뇌는 "조선 민중의 성격은 매우 단순하여 사리를 깊이 따지길 싫어한다. 성교(聖敎)의 진리를 가르치면 곧 감당하여 믿음에 들고 어떠한 희생이라도 무릅쓴다. 하지만 진리를 풀이하면 잘못 알아듣는다. 특히 부녀자들과 천민층 남자들이 그러하다"고 했다.
이규태는 "이처럼 터무니없이 빈약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서도 그 가혹한 형벌을 이겨내고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던 신앙심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국 여성이 대대로 감수해온 수난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곤란하다"며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한국에 천주학이라는 신교가 들어오자 한국 여성들은 오랫동안 막연하게 그려오던 탈출구에 눈을 떳다. 유식하고 무식하고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억눌려온 '모럴'에 저항했고 또 그토록 가혹한 고문을 감당해냈으며 사지를 찢기우면서도 웃으며 죽어갈 수 있었다. 즉 교리엔 무식하면서도 신앙심이 깊었던 것은 한국 여성이 당한 사회적 구속에 대한 반발이요 저항이었다. 천주학은 말하자면 그 레지스탕스에 어떤 계기를 만들어주었다고도 볼수 있다."
-한국근대사산책,강준만,p97
이론은 인간의 존엄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다만 최소의 알리바이를 제공한다.